<대중문화가 먼저 말하다>
우리 연구소 올해 콜로키움 대주제는 "대중문화 속 과학"입니다. 그동안 대중문화와 과학은 별 개의 세계였는데 이에 대한 문제제기 성격이 있습니다. 두 영역은 실천의 영역에서는 함께였지만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이분되어 있었죠. 대중문화가 전문가 문화와 강하게 연결됨에 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해러웨이(D. Haraway), 라투르(B. Latour) 등 STS학자들이 ‘물질-기호학적 접근(material-semiotic approach)’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기호학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물질적인 것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요? 최근 나의 경험을 말하면, 대중 문화 속에서 유통되는 상징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도 이론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유명해진 소설 <장미의 이름(1980)> 등을 통해서 말해야 했죠. 윌리엄 수사의 유니콘(일각수) 이야기(540쪽)가 나옵니다. 이 때 그레이엄 하먼이 라투르의 실재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유니콘과 중성자를 비교하는 장면이 즉각 떠올랐습니다. 윌리엄 수사의 견해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유니콘은 가상의 동물이지만 그 상징을 따라 가면 어떤 실재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 책의 해당 부분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사부님의 지성은 일각수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는데, 도대체 일각수라는 존재가 사부님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드소의 질문에 대해서 윌리엄 수사는 "비록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일각수는 나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서책속의 일각수는 그 흔적과 같다. 흔적이 있으면 흔적을 남긴 존재도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이미지를 통해 육체를 재구성하지는 못할지언정 다른 이들의 그 이미지에 대한 관념은 재구성할 수 있다."(장미의 이름, 540쪽)
“우리는 중성자가 유니콘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중성자가 유니콘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중성자가 자신의 현존을 증언하는 더 많은 동맹자가 포함된 더 큰 연결망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 17-18쪽)
라투르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프란츠 카프카(F. Kafka)의 <변신(metamorphosis, 1915)>을 언급했었는데요. 그 소설을 읽기 전, 라투르의 책을 볼 때는 그 대목에 별 감응이 없었는데.........(그가 그 소설을 언급했다는 것도 기억을 못함)..... 나중에 <변신>을 읽고나서 다시 읽었을 때 매우 다른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벌레가 되기 전의 그레고르는 근대의 '시민적 삶'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성공한 시민에서 전혀 그렇치 않은 존재로, 특히 혐오스러운 존재로 변한 겁니다. (이유는 알수없는데, 그레고르는 딱히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 즐기는 듯합니다) 라투르는 이 소설속 상황을 끌어와서 말합니다. "제 부모 귀에 들리는 그레고르의 그것처럼 내 말투는 뱃속의 소름끼치는 꾸르륵 소리와 비슷하게 들릴 위험이 있는데, 이것이 동물-되기의 전적인 난점이다(19쪽)" 이건 벌레(변신)가 된 후, 사람들(근대 시민)과 말이 안 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며..........그리고 라투르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변신>에 의하면... 가족조차도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데....... 변신한 사람들의 운명이 매우 절망적일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라투르의 친구, 니콜라이 슐츠(N. Schultz)의 <나는 지구는 아프다>의 서사도..... 카프카의 <변신>과 닮았습니다.. 도입 부분에서 주인공이 침대에서 무력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변신의 첫 장면과 닮았고.... 주인공(나)이 땅멀미를 느끼는 순간은 변신(다른 몸이 됨)을 상징합니다. 라투르의 책에서 땅에 도착한 후 어지럼증을 느낀다(18쪽)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라투르와 슐츠의 용어로는 사회계급(또는 시민계급)에서 지구-사회계급으로의 변신하는 순간이겠죠.
[그래서 슐츠의 책은 원제 그대로 "땅멀미(Mal de Terre)"라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땅멀미는 변신 이후 첫경험이라는 상징성이 있으니까요....역자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 최근 애나 칭(A. Tsing)의 <세계 끝의 버섯>을 읽었는데, 칭은 <모비딕(1850)>에 영감을 받은 것같습니다. ... 곳곳에서..... 저자도 직접 그 소설을 언급하기도 하고.......... 나도 <모비딕>을 읽었기 때문에 칭의 언급이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칭이 '나보다 더 <모비딕>에 감동받았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특히 유색인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사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칭의 버섯이야기에서 여러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비딕>에서 화자의 이름 '이스마엘'은 아랍문명의 조상이라는 상징이 있죠. 문명인에게 혐오적인 대상에 불과할 식인종 '퀴퀘그'의 영웅적 면모, 고래의 표정은 얼굴이 아니라 등에 난 혹에서 읽을 수 있다는 주장, 그리고 인간 문명('살인자')에 대한 평가 등이 기억납니다. 칭이 <모비딕>을 말하는 순간, 같은 책의 독자로서의 동질감 때문인지 그가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고, <모비딕>의 상징이 <세계 끝의 버섯>과 얽히면서 흥미진진해졌습니다.
칭이 주조한 개념 '구제 축적'에서 '구제(salvage)'는 특히 <모비딕>에서 영감을 받았을 걸로 보입니다. 영어 salvage의 사전적 의미 중에 침몰하는 배에서 필요한 물건은 빼내온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폐허로 만든 곳에서 송이버섯을 케내오는 행위가 침몰하는 배에서 물건을 구해내는 장면과 잘 포개집니다. 최종적으로 피커드호가 침몰할 때는 아무것도 가져올 처지가 아니게 됩니다. 이것도 상징적이죠.
칭의 책에서 곰팡이에 대한 묘사는 북유럽신화 속 엘프를 생각나게 합니다. "많은 곰팡이는 ‘잠재적으로 죽지 않는’ 존재인데, 이는 질병이나 부상 또는 자원 결핍으로 죽을 수는 있지만 나이가 많이 들어 죽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96)". 신화 속 엘프가 바로 '죽을 수는 있어도 늙지는 않는 존재'입니다. 상징적으로 곰팡이가 엘프인 거죠. 버섯은 곰팡이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버섯 역시 엘프입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린 마굴리스(L. Margulis)의 <생명이란 무엇인가(1995)>와 <공생자행성(1998)>을 읽을 때 문득 북유럽 신화가 떠올랐었는데요. 미생물의 세계가 북유럽 신화의 비합리성과 역동성을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칭의 곰팡이 소개를 들으며 그때 북유럽 신화를 떠올린 것이 영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는 회고를 했습니다. 게다가 미생물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새로운 박테리아에게 '로키' 같은 신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붙였다(2010년경)고 합니다.
"Lokiarchaeota 문은......... 첫 번째 게놈 샘플이 유래된 열수분출구 복합체를 참조하여, 북유럽의 신 로키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문학에서 로키는 "수많은 해결되지 않은 학문적 논쟁의 촉매제가 되어온 엄청나게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양가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왔으며, 이는 진핵생물의 기원에 대한 논쟁에서 로키아카에오타의 역할과 유사합니다."(위키피디아)
미생물학자들도 신화와 미생물의 삶이 닮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은 둘 사이의 닮음이 강력하다는 것이겠죠. 이것은 또다른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우리의 기억의 심연 속에 미생물 시절의 경험이 남아서 신화가 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합니다. 여기저기 커다란 틈새가 벌어져 있습니다. 소설 같은 대중문화는 우리의 결핍을 기호(상징)로 메워줄 수 있습니다. 우리 연구를 풍부하게 해줄 겁니다. 우리가 대중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장기적으로 과학기술학이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는 것을 지향하면 어떨까요! <redgrass@korea.ac.kr >
"대중문화 속 과학" 콜로키움 안내 http://sts-institute.korea.ac.kr/?page_id=1298&vid=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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